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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16M DRAM 개발자' '스카이레이크 인베스트먼트 CEO' 진대제 대표님

 

 

 

 

 

 

 

 

 

 

 

 

 

 

 

 

 

 

 

 

 

 

 

 

 

 

1952년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지리산 자락의 여배리에서 태어났다.

50여 년 전 나의 고향은 말 그대로 벽촌이었다. 어릴 적 기억에, 대청마루에서 내다보이는 것은 앞을 꽉 가로막아 숨이 막히는 높은 산뿐이었다.

당시 많은 가정이 그랬듯이 우리 일가에도 6·25사변의 생채기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먹고살기가 어려웠던 친척들은 부산으로 김해로 뿔뿔이 흩어져 떠나갔고, 우리 가족도 내가 네 살 때 고향을 등지고 대구로 이사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 가족의 도시생활은 가난과 궁핍의 연속이었다.

호적을 보면 나는 1남 2녀 중 외아들이다.

그러나 내게는 핏줄이 같지만 다른 호적에 올라 있는 형님이 한 분 있다.

우리 집안의 종손이었던 큰집 아저씨가 자손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 여파가 우리집에까지 미쳤던 것이다.

큰집 아저씨의 일은 내 아버지의 인생에 큰 변화를 몰고왔다.

아들을 낳아 종갓집에 양자를 보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장가를 든 것이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한창 공부를 해야 할 나이에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사명을 안게 된 아버지는, 그런 연유로 양반행세나 하며 일하는 것은 아주 서툰 사람이 되었다.

대신 집안일은 열일곱 살에 시집온 어머니가 꾸려나가야 했다.

어머니는 밤낮으로 삯바느질을 하고 때때로 먼 산까지 가서 땔감을 구해오곤 했다.

어머니는 모두 10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대부분 전쟁통에 사망하고 결국 2남 2녀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가 마흔이 넘어서 낳은 늦둥이다.

어머니는 밤낮으로 농사일을 해야 했으므로 주로 큰누이가 나를 업어서 길렀다고 한다.

어머니 젖이 안 나오니 젖은 얻어먹어보지도 못했고, 달래주는 엄마도 없으니 하루종일 울면서 업어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지금도 누이들은 내가 엄마 젖도 못 얻어먹고 그후로도 가난 때문에 제대로 먹지를 못해 키가 자라지 못했다고 혀를 찬다.

막내라 그랬는지 나는 응석이 심해서 초등학교 2학년 때도 가끔 어머니 등에 업혀 학교에 가곤 했다.

하루는 어머니 등에 업혀 대구 방천길을 가는데, 인부들이 모래를 채취하기 위해 체질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본 내가 어머니께 물었다.

  “엄마, 저 사람들 뭐 하고 있는기고?”
  “모래 팔아서 돈 벌고 있다 아이가.”

그때 밤낮으로 고생하는 어머니 처지가 가여워서 그랬는지, “엄마, 내도 나중에 모래 팔아가 돈 억수로 마이 벌어주께”라고 약속했던 기억이 있다.

어린 마음에 흔하디흔한 모래를 팔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실제로 반도체의 주원료인 실리콘도 모래의 일종이니 그 약속은 지킨 셈이다.

아마도 반도체는 나의 운명이 아닌가 싶다.
 
내게 학창시절은 그리 즐거운 기억이 아니다.

가난 때문이었다. 기워 신은 양말이며 발가락이 나오는 구멍 뚫린 운동화, 점심시간마다 친구들 앞에 내놓고 싶지 않았던 보리밥도시락이 한창 감수성 예민한 시절 내게 큰 상처가 되었다.

때문에 내가 어른이 되면 이런 가난의 불편함을 절대로 자식들에게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뭐든지 열심히 하고 또 남한테 져서는 안 된다는 집념이 생겼고, 그게 유달리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나의 승부욕을 형성했는지도 모르겠다.

가난 탓에 누이 둘은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집을 떠나 서울 친척집에서 기식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내가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담임선생님께서 주선해주신 장학금 때문이었다.

아마도 공부는 곧잘 하는데 월사금 한번 제대로 못 내는 조그마한 학생이 불쌍해서 담임선생님이 몰래 신청해 주셨던 것 같다.

그때 그 장학금이 600원 정도였는데, 그 이후로는 등록금을 낸 기억이 없을 정도로 매년 장학금을 받았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그렇지 않아도 어려웠던 우리집 형편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어머니가 이집 저집 다니며 빨래나 집안일을 해주고 돈을 받아왔지만 혼자서 모든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내가 도시락을 못 싸가는 날이 생기면서부터 우리 가족은 모두 각자 먹고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내게 공부는 그 정도 했으면 됐으니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해 하루빨리 혼자 밥벌어 먹고살라고 하셨다.

나는 그것이 ‘내 운명’이려니 했고 그렇게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우리 옆집에 독신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큰누이뻘 되는 분이 한 분 계셨는데, 내가 공부를 곧잘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공고에 가는 것을 한사코 말렸다.

자기가 도와주겠으니 큰누이가 있는 서울로 가서 공부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어차피 아무런 대안도 없었던 부모님은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나는 그 누나(나는 그분을 ‘대구누나’라고 부른다)가 시키는대로, 전교 10등을 오락가락하던 내 성적에 맞춰 경기고등학교에 지원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공고에 갈 뻔했던 ‘내 운명’은 서울로, 그것도 한국 최고의 명문고등학교로 유학을 떠나는 운명으로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막상 그 어렵다는 경기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은 했지만 서울에 마땅히 머물 곳이 없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아는 집이라곤 큰누이 집이 유일했는데 그곳도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이 못 되었다.

마침 대구에서도 오갈 데가 없어진 아버지께서 서울로 올라오셔서 함께 자취를 하며 살기로 했다.

아버지와 함께 허름한 사글세를 얻어 들어간 곳은 서부이촌동의 철거민촌이었다.

거기서 전차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해서 경복궁 근처에 있는 학교까지 등하교를 했다.

생활비는 어머니가 보내주셨지만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금쪽같이 아껴써도 항상 모자라 돈이 떨어지는 날부터는 밥을 굶어야 했다.

돈이 없어 아들에게 밥을 지어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그 한서린 얼굴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한강변에 위치한 서부이촌동에는 곧 아파트가 들어서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렇다는 말만 듣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집이 온데간데없었다.

한나절 만에 집이 감쪽같이 철거되어 버린 것이다.

며칠 안에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한다는 말이 나돌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나마 무허가 집이라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얘기였다.

거기서 사글세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혜택도, 아무 대책도 없었다.

아버지도 나도 무척 황당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판자들을 하나둘 주워다 오막살이 같은 임시거주지를 만들어 몇 달을 지냈다.

그러다가 이렇게는 공부는커녕 생활조차 안 되겠다 싶어, 외가쪽 친척의 도움을 받아 그 집 아이들의 입주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비록 남의집살이였지만 적어도 먹고 자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나는 감사했다.

그 친척집에 머무는 동안 나는 책도 많이 읽고 시도 쓰고 수필도 썼다.

내가 문학소년이 된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하는 ‘문학의 밤’ 행사에서 자작시 낭송도 하고, 교회 청년모임에서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1학년 2학기부터 2학년 여름방학까지는 그렇게 편안하고 즐겁게 보냈다.

그 집 아이들에게 수학이나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고, 친척이 많이 배려해 주어 처음으로 자유와 풍요를 누려보았다.

물론 내게 공부하라고 종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학년 2학기 때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오셨다.

우리는 바닥이 기울어져서 자다 보면 한쪽으로 몸이 쏠리기까지 하는 허름한 단칸방을 얻었다.

드디어 오랫동안 떨어졌던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된 것이다.

가난했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있어 행복했고 무엇보다 공부를 계속할 수 있어 감사했다.

고3이 되어 처음 본 실력고사에서 나는 전교 24등을 했다.

학교에서는 상위 10등 안에 드는 학생들을 ‘베스트10’이라고 불렀다.

그 10명의 이름과 점수를 적은 종이가 커다랗게 나붙고, 간단한 상도 주었다.

나는 조만간 전교 10등 안에 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당시 학교에서는 도서관의 일부를 독서실로 개조해서 방과 후부터 밤 10시까지 자습을 하도록 배려해 주었는데, 좌석이 모자라다 보니 늘 자리경쟁이 심했다.

나는 수업 끝나기가 무섭게 달려가서 자리를 차지하고는, 매일 밤 10시까지 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갔다.

그러니 저녁까지 도시락이 두 개 필요했지만, 우리집 형편에 차마 도시락을 두 개 싸달라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나는 집에 도착하는 밤 11시가 되어서야 저녁밥을 먹고 잘 수 있었다.

당시 10원짜리 삼립 크림빵이 처음 나왔는데, 배가 고파오는 저녁때면 그거 하나 사먹는 게 소원이었다.

두 번째 실력고사에서는 간발의 차로 ‘베스트10’에 못 들었다.

11등. 엄청난 성적향상이었지만, 나는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약이 많이 올랐지만 하소연하거나 도움을 청할 상대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갑자기 성적을 잘 내자 담임선생님이 크게 놀라셨다.

선생님은 내가 어려운 형편에서 공부한다는 사실을 아시고는 장학금을 받도록 주선해 주셨다.

덕분에 외환은행으로부터 당시로는 상당한 액수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후로는 남들처럼 도시락을 두 개씩 싸가지고 다닐 수 있었고, 추운 겨울날엔 10원짜리 우동국물을 하나 사서 찬 도시락과 함께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우동국물이 얼마나 따뜻하고 감사했던지.

그 다음 실력고사부터 나는 줄곧 ‘베스트10’에 들었고, 한 번도 후퇴하지 않았다.

성적은 계속 상승곡선을 그렸다.

경쟁상대였던 다른 친구들은 국영수는 물론 사회, 역사 등의 과목도 족집게과외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 친구들을 이기는 길은 오직 수학과 영어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는 것뿐이었다.

그야말로 ‘선택과 집중’이었다고나 할까.

고3 한 해 동안 주말이고 휴일이고 없이 자습실에서 공부를 했으나, 자습실에 들르지 않는 날도 며칠 있었다.

그중 하루는 대성학원 등 학원가에 가서 돈을 벌어오는 날이었다.

학원마다 실력고사가 있어서 거기서 입상을 하면 적지 않은 상금을 줬다.

나는 거기에 출전해서 상금을 타다가 살림에 보태곤 했다.

또다른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오랜만에 2학년 때까지 다니던 남산교회에 들러 친구들도 만나고 크리스마스 예배도 드렸다.

당시 눈이 침침하게 잘 안 보이고 귀에서 소리도 나는 이명증까지 생겨서 무척 고생했는데, 아마 영양이 부족한 상태에서 눈을 혹사한 탓이었던 것 같다.

나는 기도했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몸에 더 이상 문제가 생기지 않게 돌봐달라고.

나는 경기고등학교 3년을 통틀어 전교 6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대학 입학시험에서는 법대 수석보다도 높은 점수를 받아 공과대학 시험을 치른 경기고 친구들을 모두 물리쳤으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학교 학생에게 2점 차이로 수석을 뺏겼다.

남에게 지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던 내가 수석을 놓친 것이다.

당시로서는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안타깝고 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만약 그때 내가 수석을 했다면 오늘날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도전할 상대가 없다고 착각하고 자만하여 더 이상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 달리는 나의 삶의 태도는 이때 규범화되었는지도 모르겠다.

1970년 초반 당시, 한국의 반도체수준은 걸음마단계였다.

이렇다 할 체계적인 이론이나 자료가 없어서 스스로 찾아 공부해야 했다.

그러다가 74년 말 미국에서 현대적인 반도체를 공부한 분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사정이 많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분이 바로 ‘한국 반도체의 대부’라고 불리는 과학원(KAIST)의 김충기 교수다.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페어차일드사에서 근무한 교수님은 나같이 반도체를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에게는 그야말로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내가 약 10년 후에 찾아가 반도체개발로 일본을 집어삼키겠다고 했을 때 ‘세상에서 목구멍이 제일 큰 놈’이라고 하셨던 분이다.

당시에는 반도체를 공부하는 학생이 거의 없다 싶을 정도로 적었으며, 과학원에 관련과목이 개설된 것도 아니고 실험실도 없었기 때문에 김 교수님이 강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와 몇몇 서울대 대학원 학생들은 ‘얼씨구나’ 하고 교수님을 모시고 세미나도 하고 학술토론도 하는 등 교수님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과학원이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당시에는 서울공대와 과학원 사이에 라이벌의식이 강했다.

내가 반도체공부를 한답시고 홍릉에 있는 과학원을 들락거리자 서울대에서는 ‘찍힌’ 학생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나는 학부와 대학원 시절 내내 반도체와 함께했다.

돌아보면 그렇게 열심히 열정적으로 공부한 적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것 같다.

그때의 그 공부는 후에 반도체를 개발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됐다.

석사과정에서 반도체연구를 할 때는 두 발을 날려버릴 뻔한 적도 있다.

당시 반도체연구로 죽이 맞았던 박영준(현재 서울대 전기공학과 교수)이라는 1년 후배가 있었는데, 그 친구와 재료공학과 실험실을 빌려서 반도체장치를 설치하고 실험을 하곤 했다.

하루는 반도체설비의 청정상태를 만들기 위해 황산, 질산 같은 강한 산성재료를 넣은 청정액을 끓이고 있었다.

청정액을 유리용기에 담아 부글부글 끓이는데, 유리용기가 그만 열을 받아 깨져버렸다.

순식간에 20평 남짓한 실험실 바닥에 청정액이 좍 깔렸다.

실험실 바닥에는 수소와 산소를 보관하는 통이 여러 개 놓여 있었는데, 그것들이 청정액에 녹아버릴 경우 폭발할 위험이 있었다.

깜짝 놀란 우리는 양동이로 물을 퍼다 부으면서 청정액을 닦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나중에 발이 쓰려 쳐다보니 발바닥이 피로 얼룩진 듯 벌겋게 되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슬리퍼와 양말이 강한 산에 녹아 발에 붙어버린 것이었다.

하마터면 두 사람 다 발이 날아갈 뻔했다.

실험을 하려 해도 제대로 된 반도체장비도 없고 제대로 가르쳐줄 사람도 없어, 나는 늘 발로 뛰어다니며 재료를 구해다가 직접 만들어서 실험과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청정액사건 같은 안전사고도 여러 번 겪었다.

당시 과학원 말고 반도체를 연구하고 실질적인 제작실험도 할 수 있는 곳이 딱 두 군데 있었다.

후에 삼성반도체의 모체가 된, 경기도 부천에 공장이 있는 한국반도체라는 회사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였다.

나는 이 두 곳에 가서 배우기도 하고 웨이퍼 같은 반도체재료도 얻어오곤 했다.

몰래 쓰레기통을 뒤져서 쓰다 버린 웨이퍼를 가져다가 잘라 쓰기도 했다.

그렇게 얻어온 실리콘웨이퍼를 가지고 반도체소자를 직접 만들어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석사과정을 마치면서 나는 인생을 반도체에 걸겠다고 결심했다.

70년대 중반 당시에는 반도체가 앞으로 중요해질 거라는 말을 흔히들 하곤 했지만, 정작 국내에서 반도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반도체는 수학과 물리를 좋아하는 나의 적성에도 맞는 분야였지만, 매우 어려운 학문이고 고도의 전문기술이었기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수학과 물리에 도통하고 이를 응용해야 함은 물론 다차원의 공간지각 능력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분야로, 다른 공대생들은 거의 기피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반도체의 특징이 나의 도전정신을 자극했고, 산을 하나하나 넘으며 새로운 것을 알아낼 때마다 느끼는 보람과 쾌감이 나를 유혹했다.

어려서부터 미술과 조각, 디자인 등에 유달리 관심과 소질이 많았던 것도 반도체의 설계와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반도체의 무한한 잠재력과 성공가능성에 대해서는 그 당시에는 잘 알지 못했고, 오로지 순수한 학문으로서의 매력에 매료되어 밤잠을 설치곤 했다.

1976년, 애타게 바라던 미국 유학이 좌절됐다. 다른 건 몰라도 공부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쓴맛’을 본 적이 없었던 나의 상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실 입학허가를 받은 곳은 10여 군데나 되었다. 하지만 장학금을 주겠다는 학교가 하나도 없었다.

집안형편상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유학이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다. 장학금수혜 대기자명단에 오른 학교도 대여섯 군데 있었지만, 끝내 장학금이 오지 않아 결국 ‘유학재수’를 하게 됐다.

‘우리집 형편이 한 학기 등록금이라도 대줄 수 있다면, 그래서 일단 유학을 갈 수만 있다면, 가서는 어떻게든 장학금을 받을 자신이 있는데……. 한 학기 등록금만, 한 학기 등록금만…….’

미국 명문대학에 유학가 있는 친구들 얼굴이 떠오를 때면 안타깝고 억울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가난 때문에 받았던 상처와는 또다른 아픔이 가슴을 쳤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원에서 알게 된 김도현 형(현재 국민대학교 교수)이 ‘소개팅’을 한번 해보라고 권했다.

형은 샘터사에서 편집기자로 일하는 ‘김씨 아가씨’라고 있는데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으니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아가씨면 아가씨지 ‘김씨 아가씨’는 또 뭐냐며 이름을 물었더니, 일본어학원에서 알게 된 사이인데 학원에서는 일본식으로 ‘김상’ ‘이상’ ‘진상’이라고만 부르기 때문에 이름은 모른다고 했다.

나는 ‘내가 지금 여자나 만날 처진가’ 하는 생각에 처음에는 그냥 흘려들었다.

 그런데 하루는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오다가 불현듯 ‘김씨 아가씨’가 일한다는 샘터사에 한번 들러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처량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해서 누군가 만나 이야기나 좀 하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었다.

당시 샘터사는 을지로 5가에 있었는데, 그 건물 지하다방에서 전화를 걸었더니 ‘김씨 아가씨’는 무척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속으로는 ‘이거, 괜한 짓을 했나’ 싶었지만, “김도현씨를 아시지요? 소개를 해주겠다고 하던데 지금 지하다방에 와 있으니 좀 내려오실 수 있습니까?” 라고 말했다.

그녀는 곧 내려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대면을 하고 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서로 어색해하다가, 썰렁한 분위기를 극복해 보려고 스무고개로 이름 알아맞히기를 하자고 했다.

때로는 이름을 모르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스무고개를 넘기기 전에 ‘혜경’이라는, 드물지 않은 그녀의 이름을 쉽게 알아맞힐 수 있었다.

그녀는 서울대 가정학과를 졸업한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의 아가씨였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도 나처럼 가난한 집안에서 장녀로 어렵게 자란 것 같았다.

스무고개 이후 별다른 화젯거리를 찾지 못한 우리는 한 시간가량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다 헤어졌다.

그후로는 내 처지가 그래서였는지 그녀와의 만남도 지지부진했는데, 무릇 세상의 모든 인연이 그러하듯 갑자기 그녀와 부쩍 가까워지는 계기가 생겼다.

그때는 지금처럼 휴대폰이나 컴퓨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전화나 편지가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는데, 전화조차도 귀한 시절이라 우리집에 전화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만나고 헤어지면서 다음에 만날 날을 미리 ‘예약’해서 만나야 했다.

그런데 8월 어느 날 만나기로 약속한 그녀가 나타나질 않았다.

갑자기 가슴에 스산한 바람이 일면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갑자기 회사에서 2박 3일 일정으로 편집회의를 떠났다고 했다.
혹시 연락이 오면 그렇게 전해달라고 했단다.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그냥 떠났다는 것이다.

안도감과 함께 어느새 그녀가 내 마음에 성큼 들어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후로는 만남이 잦아졌다.

당시에는 서울공대가 태릉 근처에 있었다.

청계천에서 버스를 타고 학교까지 가려면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가야 했다.

키 작은 그녀가 힘들게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애처로워 내 팔을 대신 잡으라고 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싫다고 하더니, 힘이 많이 들었는지 못 이기는 척 팔짱을 끼었다.

나중에 하는 말이, 자기는 팔짱을 낄 정도면 상당히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그런 사이인가 하고 엄청 망설였단다.

내가 자꾸 팔짱을 끼라고 하니까 ‘저이는 나를 아주 가깝게 생각하나 보다’ 하고 팔짱을 꼈는데,
나중에는 팔목까지 잡혔으니 이 사람과 ‘진짜’ 가까이 지내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사람은 지금도 누가 “어떻게 결혼하셨어요?”라고 물으면 “발목이 아니라 팔목을 잡혀서 결혼했어요”라고 웃으며 말하곤 한다.

나중에 그녀에게 나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느냐고 물었더니, 다짜고짜 회사로 찾아온 배짱과 자신감이 멋져 보였다고 했다.

그렇게 인연을 만들어가던 76년 그해, 처음으로 국비유학제도가 생겼다.

그것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쁜 희망이자 기회였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당당하게 국비유학생 1호로 선발된 나는 벅찬 가슴으로 내 삶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불행이 혼자 찾아오지 않듯 행운 또한 그런 것인지, 이듬해에는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장학금도 받게 되어 장학금을 두 가지나 받고 여유있는 마음으로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나는 안다. 나의 아내가 아니었다면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임을.

‘김씨 아가씨’는 내 ‘헝그리 인생’에 찾아든 가장 큰 축복이자 선물이었다.

유학재수를 하지 않았다면 아내를 못 만났을 테니,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 이 정도면 재수도 한번 해볼 만하지 않은가.

1977년 7월 10일 나는 ‘김씨 아가씨’를 아내로 맞았고, 8월 10일에는 아내의 손을 잡고 유학길에 올랐다.

국비장학금과 함께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의 장학금을 받고 떠나는 유학이었지만, 유학길에 오르는 내 발걸음은 희망과 기대로만 가득 차 있지 못했다.

연로하신데다 병중에 계신 아버지, 평생을 고생으로 살아오신 어머니를 떠나면서 혹시 이것이 두 분을 마지막으로 보는 게 아닐까, 내가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온갖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국에서의 삶에 대한 두려움도 커서 내 머릿속은 그야말로 뒤죽박죽이었다. 

다행히 수업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것, 더 깊이있는 학문을 접한 기쁨이 커서 서울을 떠날 때의 섭섭함, 부모님에 대한 걱정 등을 많이 덜 수 있었다.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전자공학 박사과정에서는 반도체와 관련된 물리, 수학, 플라즈마, 양자역학 등을 공부했다.

나는 전자공학과 반도체관련 기본과목의 기초가 꽤 탄탄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학교생활에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필기시험으로 치러지는 박사자격시험을 통과하려면 반도체 외에 다른 과목도 공부해야 했다.

그중 통신 등 다른 분야는 걱정이 없었지만, 컴퓨터관련 과목은 아주 어렵게 생각됐다.
 그때까지 한국에서는 컴퓨터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컴퓨터와 관련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첫 번째 숙제가 나와 나름대로 열심히 답안을 작성해서 냈는데, 결과를 받아보니 거의 ‘빵점’에 가까운 점수였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공부깨나 한다고 자부하던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야, 이거 큰일났다’ 싶어 그 길로 교수를 찾아가, 혹시 내 영어에 문제가 있느냐고 물었다. 스톤 교수가 파란 눈을 크게 뜨며 무미건조한 톤으로 말했다.

“You have no problem with your English. Your answer is wrong.”

(자네 영어에는 아무 문제가 없네. 다만 자네 답이 틀렸네.)

스톤 교수는 이름 그대로 돌처럼 딱딱하고 퉁명스러운 사람이었다.

나는 이 과목이 어렵긴 해도 박사자격시험을 위해 꼭 공부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수의 대답은 냉정했다. “Whydon’t you drop it? If not, you will flunk.” (그럼 수강을 취소하게. 아니면 낙제할 거야.)

이 소리를 듣는 순간 뱃속에서 확 끓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오기였다.

박사자격시험을 통과하려면 무조건 이 과목을 들어야 했으니 물러설 수도 없었다.

어디 한번 끝장을 내보자. 나는 곧장 컴퓨터설계에 관한 기초서적 세 권을 샀다.

UCLA, USC 등의 대학에서 교재로 쓰이는 책들이었는데 이걸로 기초부터 닦으려는 심산이었다.

밤을 새가며 새로 산 책과 기존의 고급강의 교재를 병행해서 공부해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같던 고급컴퓨터설계학도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다음 숙제는 20점을 받았고, 점점 점수가 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두 과목은 기말 리포트만 제출하면 되었기에 미리 잽싸게 써버리고, 마지막 두세 달을 컴퓨터과목에 말 그대로 올인했다. 

당시 매사추세츠 주립대 공과대학에는 깨지지 않는 전설 같은 게 하나 있었다.

 “1층 학생이 2층에 올라와서 A학점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과대 건물의 1층에는 반도체·통신 등의 학과가, 2층에는 컴퓨터학과가 있는데 1층 학과 학생들 중 컴퓨터공학 과목을 수강해서 A학점을 받은 적이 학과 개설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뭐, 까짓 거 한번 받아보자.’

드디어 기말이 가까워졌고 이제는 컴퓨터에 관해 제법 잘 이해하고 있었다.

기말고사를 치렀다. 상당히 잘 본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안타깝게도 A학점을 받기에는 간당간당한 점수였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미국에 온 이래 모든 과목에서 A만 받았던 나의 학점역사에 유일한 오점을 남기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강의시간. 교수가 지난시간에 내준 숙제 중 가장 어려운 문제를 뽑아 학생들에게 앞에 나와서 풀어보라고 했다.

스톤 교수의 수업 시간에 나가서 문제를 푸는 일은 상당한 용기를 요하는 일이었는데 문제를 푸는 학생들은 주로 유대인 학생들이었다.

그날도 어느 유대인 학생이 나가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칠판에 분필로 쓱쓱 써나가는데 어,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나는 저 문제를 다르게 풀었는데.’ 나는 내 풀이방식이 정답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마침 교수가 문제를 푸는 학생을 저지했다. 틀렸다는 의미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손을 번쩍 들었다. 순간 스톤 교수의 표정이 알싸해졌다.

‘쟤가 공부하다 아예 미쳤나?’하는 표정이었다.

 “Mr. Chin.”

교수가 힘주어 호명했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나가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3분의 2 정도 풀었을까? 교수가 됐으니 그만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머지는 안 봐도 정답이라는 의미였다.

학생들의 박수를 받으며 머쓱하게 자리로 돌아왔다.

유대인 학생들이 뒤돌아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 학기 성적표를 받아들던 날, 나는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성적표를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고급컴퓨터설계학 과목 옆에 큼지막하게 A가 박혀 있는 게 아닌가.

마지막 시간에 난제를 풀었던 것이 보너스 점수를 받은 모양이었다.

그날 내 몸은 도체(Conductor)였다.

온몸에 전기가 좌악 흘렀다.

밤새며 고군분투하던 날들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게 ‘1층 학생’으로는 최초로 ‘2층 고지’를 탈환함과 동시에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에서 2년간 수강한 모든 과목에서 올A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의 ‘휴지통’이라는 소식란에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작은 기사가 하나 났다.

‘국비유학생 제 1호 진대제, 전과목 A 받아.’


매사추세츠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박사자격시험에 합격한 나는, 1979년 초 비슷한 반도체분야의 스탠포드대학 더튼 교수에게 연락해, 전학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더튼 교수는 전과목 A를 받은 내 성적과 논문을 보고는, 입학허가는 물론 장학금도 검토해 본 후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지만, 2월이 훌쩍 지나가도록 아무 연락이 없었다.

나는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더튼 교수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벨이 길게 울린 후 더튼 교수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교수님은 어디 출장을 갔다가 방금 사무실에 들어왔고 15분 정도 있다가 또 해외출장을 가야 한다면서 “마침 그 짧은 순간에 전화를 했구먼” 하며 반가워했다. 나는 얘기 끝에 장학금에 대해 물었다.

“아니, 그게 아직 해결이 안 되었단 말인가? 내가 두 달 전에 얘기를 해두었는데……

대제, 잠깐만 기다리게, 내가 알아보고 전화해 주지.”

한 30분쯤 기다렸을까, 더튼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 이제 되었네. 장학금을 주는 것으로 결정해 두었으니 금방 연락이 있을 거야.

그런데 졸업하면 바로 올 수 없을까? 여름방학부터 연구를 시작하면 좋겠는데.”

나는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잘못하면 여름에 오갈 데 없이 놀아야 할 판인데, 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나는 당연히 그 제안을 받았들였고, 남들보다 3개월 앞선 6월부터 스탠퍼드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무엇이든 간절히 소망하면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스탠퍼드대학으로 옮겨온 첫 학기 말에 박사진입자격시험(Qual)에 합격한 나는 승승장구 거칠 것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어려운 점은, 가족이 셋이다 보니 살림규모도 커지고 매사추세츠에 있을 때보다는 아파트 임대료와 생활비 등이 모두 많이 든다는 것이었다.

의료보험도 비싸서 집사람과 아들애 보험을 미처 들기 전에 그만 둘째가 생겼다.

스탠퍼드대학병원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좋은 병원이지만 비용이 너무 비싸서, 우리는 산호세에 있는 가톨릭계 오코너병원에서 아기를 낳았다.

다행히 우리 사정을 들은 사회복지사가 출산비용을 600달러로 산정하고, 그것도 한 달에 50달러씩 1년에 걸쳐 갚게 해주었다.

보험료보다 싸게 아기를 낳은 것이다.

집사람은 그때도 남의 아기를 두셋 돌봐주고 받은 돈으로 서울 부모님께 조금씩 송금도 하고 살림에도 보태고 있었다.

예정일을 3주 앞두고 일을 쉬면서 출산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둘째가 그만 3주 빨리 태어나는 바람에 출산하기 전날까지 하루도 쉬지 못하고 말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나는 1981년 7월부터 스탠퍼드대학 한국학생회 회장을 맡아 금요 테니스경기, 가족캠핑, 한국식품점에서 식품 공동구매하기, 여름에 새로 오는 신입생들 자리잡는 것 도와주기 등 그동안 한국학생회에서 해오던 활동을 좀더 체계화하고 적극적으로 펼쳤다.

또 국제센터와 샌프란시스코 주재 한국영사관의 협찬을 받아 ‘한국의 날’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학생회가 커지자 모임 음식을 준비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부녀회장을 뽑았는데, 현재 대전과학원의 황규영 교수 부인인 송정혜 여사가 두 발 벗고 힘써주었다.

우리는 회칙을 새로 만드는 등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학생회를 체계화하고, 매달 회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에너지가 충만해 무엇이든 열심히 즐거운 마음으로 해내던 시절이었다.

스탠퍼드에서 박사논문이 거의 마무리될 즈음이던 1982년 11월, 보스턴에서 열리는 국제학회의 초청으로 논문을 발표하러 갔다.

집을 떠나 호텔방에 혼자 누워 있으려니 가족 생각도 나고 쓸쓸해지더니 문득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벽촌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온 시간들.

가난을 헤치며 꿈꾸고 도전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순간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오다 잠시 멈추어서서 뒤돌아보니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뭔가 뭉클하게 솟구쳐오르는 뜨거움이 있었다.

감사의 마음이었다.
 
‘오늘날 내가 여기 서 있는 것은 나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랬다. 순간순간 나를 일으켜준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껏 이토록 열심히 살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600원의 첫 장학금을 받은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등록금을 낸 기억이 없었다.

이렇게 세계적인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좋은 논문을 쓰게 된 것도 나 혼자의 힘으로 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없어서 유학의 꿈이 좌절되었을 때 국비유학제도가 생겨 유학올 수 있었던 일, 박사학위를 무사히 마치고 이미 IBM 취직이 확정된 일이 모두 우연만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항상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이긴 했지만, 늘 그 이상의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정말 감사할 따름이었다.

세상에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한 가지 답하기 어려운 것은 ‘감사하긴 한데 누구한테 감사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숨가쁘게 뛰어온 도전의 갈래마다 나를 도와준 누군가가 있다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이런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문득 나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성경이었다.

불현듯 혹시 사람들이 말하는 신, 혹은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내게 길을 만들어준 장본인도 바로 그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경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불교를 열심히 믿었지만, 서울에 혼자 떨어져 있던 나는 주말이면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가곤 했다.

일요일에 특별히 할 일도 없었고 찬양대에 들어가면 점심을 잘 먹여주니 일요일 예배와 토요일 학생예배에 가끔 나가곤 했다.

그러나 특별한 신앙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곳의 친구들과 어울려 교회 월간지도 만들고 어울려 노는 것에 더 집중했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 자체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 보스턴의 밤을 밝히며 읽은 성경말씀은 내게 무언가 다르게 다가왔다.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영적인 감동이랄까.

나는 종교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주변에 오수영 박사라고 독실한 천주교신자가 있었다.

고교 및 대학 선배이기도 한 그는 스탠퍼드에서도 같은 교수 밑에서 공부할 정도로 나와는 인연이 깊었다.

언젠가 그 선배 가족과 보름 정도 미국 서부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를 보면서 ‘어쩌면 인품이 저렇게 훌륭할까’ 하고 부러워했었다.

한마디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인격의 소유자였다.

갈수록 선배의 성품과 인생을 대하는 자세를 본받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선배의 삶의 구심점이 바로 종교였다.

 보스턴에서 돌아와 오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따졌다.

“왜 우리더러 교회에 같이 가자고 안 하느냐?”고. 그랬더니 껄껄 웃으면서 “이제 너도 성당 다닐 때가 됐냐?”라며 흐뭇해했다.

그러고 몇 달이 지나 나는 성당에 한번 가보기로 했다.

수요일에 마침 미사가 있다고 해서 성당을 찾았는데, 그날이 바로 ‘애시웬즈디(Ash Wednesday)’라고 불리는 ‘재의 수요일’이었다.

나로서는 생애 처음으로 가보는 성당이었는데, 그날의 미사는 특별히 장엄하게 치러졌다.

신부님이 내 이마에 재를 발라주는 순간, 가슴에 뭔가 뭉클하게 솟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부터 교리공부를 시작했고 주일마다 미사에 참석하면서 나는 내가 감사할 대상이 하느님이라는 확신을 조금씩 굳혀갈 수 있었다.

나는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리고 83년 부활절에 우리 부부는 영세를 받았다.

그런데 왠지 모를 서러움이랄까, 감격이랄까, 그런 감정이 북받쳐올라 우리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그동안 살아온 세월 속에 녹아 있던 회한이 눈물이 되어 흐르는 것 같았다.

동시에 감사의 마음도 억누를 길 없었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데 그때 심연 어디선가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래, 대제야! 실컷 울어라.”

내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끝낸 것은 1983년 5월이었다.

당시에는 오일쇼크로 불경기가 계속되어 박사학위 보유자, 그것도 외국인 학생을 뽑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런 중에도 나는 다행히 상당히 높은 연봉을 받고 IBM에 입사하게 되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이자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IBM이라면 나의 꿈을 펼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IBM의 두뇌인 왓슨연구소에서 일하게 된 것은 세계 최고의 반도체기술을 섭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매달 한 건씩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특허출원을 해보자고.

IBM은 각종 기술과 정보의 보고였지만, 나는 이미 반도체소자 분야의 이론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새로운 것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반도체소자를 직접 만드는 공정기술 분야를 경험해 보고 싶어졌다.

사실 내게는 나 자신과의 굳은 약속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세계 최고의 반도체기술을 제대로 섭렵했다고 판단되는 날 한국의 반도체산업을 일으키는 데 기여하겠다는 것이었다.

메모리기술을 전반적으로 익히는 것이 한국에 돌아갔을 때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 나는 공정분야로 옮기기를 희망했다.

다행히 입사한 지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마침 자리가 생겨, 최대치인 15% 연봉인상과 함께 공정부문으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IBM 연구소에서는 4M D램 개발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엄청나게 투자를 해가며 새로운 메모리기술을 극비리에 개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운 좋게도 나는 이런 새로운 기술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고, 버몬트주에 있는 IBM 반도체공장에도 자주 가볼 수 있었다.

당시 IBM의 메모리 수요는 엄청나서, 전세계에서 최대의 메모리반도체 생산자이자 소비자이기도 했다.

IBM 반도체공장은 스탠퍼드대학의 자그마한 실험실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규모였다.

1년 정도 제조공정 분야를 익힌 다음, 나는 소자이론과 제조공정만 가지고는 메모리기술 전반을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있음을 깨달았다.

반도체설계를 익혀야 했다. 마침 스탠퍼드대학 동문 친구인 대만 출신의 루(Lu) 박사가 메모리설계 부분의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어서 조언을 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능한 기술인력을 선발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성공요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당시에는 IBM 내에서도 상호 인재 스카우트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설계부문에서 일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고, 회사 내에서의 내 평판을 잘 알고 있던 루 박사는 사내경쟁을 감안해 15% 연봉인상과 함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2년간 두 번이나 최대치로 연봉인상을 받으면서 월급봉투가 제법 두둑해졌다.

당시 루 박사의 팀은 세계 최고속 메모리칩을 설계하고 있었는데,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때 배운 지식과 기술은 후에 경쟁사보다 더 빠른 초고속 동작칩을 개발하는 데 훌륭한 응용기반이 되었다.

1985년 당시에는 유난히 경기가 나빠서 반도체업계도 구조조정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64K D램으로 기록적인 매출을 올리던 모스테크도 256K D램의 개발 실패로 거짓말처럼 그해 여름 문을 닫았고, 다른 대부분의 회사 또한 가격 급락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한국에도 메모리반도체 공장이 설립되어, 삼성전자의 경우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사로부터 기술을 도입해 64K D램을 생산·판매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가 1달러 30센트의 제품을 30센트에 팔고 있었고, 이제 겨우 256K D램을 개발하느라 정신이 없던 때였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반도체산업의 중심이 미국을 떠나 일본과 한국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일본은 이미 반도체산업을 제패하며 미국을 앞지르는 강자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하루도 잊지 않았던 나 자신과의 그 약속을 지킬 준비와 때가 되었다는 판단이 섰다.

한국의 반도체기업들 중 그나마 사정이 제일 나았던 삼성에 의사를 타진했더니, 실리콘밸리에 있는 현지법인 연구소에 자리를 만들어주겠다며 적극적으로 영입의사를 밝혀왔다.

나는 IBM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우선 가족들과 상의했다.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분은 어머니셨다.

나무랄 데 없이 만족스러운 직장이었던 IBM을 떠나 언제 망할지도 모르는 한국 회사로 옮긴다는 것을 어머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다.

나 또한 일말의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반도체에다 돈을 쏟아붓는 이병철 회장 때문에 삼성그룹 전체가 망한다는 소문이 팽배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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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인재교육

등록일2015-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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