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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관 대표] '유방암 연구 재단 설립' '분홍리본' 에스티로더 명언, 짧고좋은글귀, 좋은글 ,좋은글귀

 

 

 

 

 

 

 

 

 

 

 

 

 

 

 

 

 

 

 

 

 

 

조지핀 에스터 멘처

 

어릴 때부터 남에게 화장해 주는 것을 좋아했던 에스티 로더 부인은피부전문가였던 삼촌이 개발한 제품을 통해 화장품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또한 삼촌으로부터 화장품 제조 지식과 경험을 전수받았다.
에스티 로더는 초기에 크림, 크림 팩, 클렌징오일, 스킨로션 등 네 가지 제품만 생산했다.
처음에는 뉴욕에서 장사를 했지만, 에스티 로더 설립 이후 15년 동안 미국 전역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제품을 판매했다.
1960년 영국 런던의 백화점 헤러즈(Harrod's)에 해외지점 1호를 열었다. 1961년 홍콩 사무소를 개설했다.
1964년 아라미스(Aramis Inc)를 세워 남성용 향수와 미용제품을 생산했다. 1968년 클리니크 연구소(Clinique Laboratories Inc)를 세웠다.
클리니크는 피부과 임상연구를 통해 안전하고 알레르기가 없으며 향과 알코올이 전혀 없는 화장품 브랜드로 알려졌다.
에스티 로더 여사는 2004년 4월 뉴욕 맨해튼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던 그녀는 ‘아름다운 여성이란, 항상 건강하고 윤기 있는 자연스러운 피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건강이란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 모두를 이야기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에스티 로더는 1906년 미국 퀸즈(Queens)에서 8자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친구들에게 화장해 주는 것을 좋아했던 에스티 로더는 피부과 의사였던 삼촌 존 스코츠(John Schotz)가 개발한 제품을 보며 화장품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삼촌으로부터 화장품 제조 지식을 전수받아 함께 만든 클렌징 제품을 시작으로 집에 작은 연구실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화장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1933년, 에스티 로더는 평소 단골이었던 ‘하우스 오브 애시 블론즈(The House of Ash Blondes)’의 원장, 플로렌스 모리스(Florence Morris)의 제안으로 헤어 살롱의 작은 코너에서 직접 만든 화장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에스티 로더는 뷰티 살롱 손님들 얼굴에 직접 자신이 만든 화장품을 발라주었고, 우수한 제품력과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 그녀는 유대계 본명인 조세핀 에스터 로터(Josephin Esther Lauter)를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도 쉬운 에스티 로더로 개명한 후 브랜드 이름 또한 자신의 이름과 똑같이 에스티 로더로 확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1936~1945)이 끝나자 에스티 로더의 제품은 뉴욕의 많은 미용실에서 인기를 끌었다. 이에 에스티 로더는 본격적으로 남편인 조셉 로더(Joseph Lauder)와 함께 뉴욕 맨해튼에 사무실을 열고, 1946년 ‘에스티 로더 코스메틱스(ESTEE LAUDER COSMETICS)라는 이름의 회사를 설립했다.

 


본명은 조지핀 에스터 멘처(Josephine Esther Mentzer)이다. 1908년 8월 1일 뉴욕 퀸스지구에서 이민자 부모인 체코계(系) 아버지와 헝가리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피부미용에 관심이 많았던 로더는 일찍이 화학자인 삼촌 쇼츠(John Shotz)가 만든 미용크림을 미용실 등에 팔러 다니면서 화장품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자신이 직접 만든 화장품을 미용실 손님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며 고객을 확보한 뒤, 화장품이 인기를 끌자 1946년 남편 조지프(Joseph) 로더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화장품 회사 '에스티 로더'를 창업하였다. 1948년부터는 뉴욕의 백화점에 제품을 납품해 고급 브랜드의 이미지를 굳혔고, 업계 최초로 무료 샘플과 고급 매장 전략으로 고객을 확보하면서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로 성장시켰다.

에스티 로더사(社)는 2004년 현재 종업원 2만 명에 10여 개의 화장품·향수 회사를 거느린 세계 최대의 화장품 그룹으로, 매년 120여 개국에 10억 달러 이상을 수출하고 있으며, 연간 매출액만도 47억 달러에 이른다.

1982년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과 함께 회사를 경영하다가 1995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1998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의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천재 경영인 20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었고, 에스터 로더사는 격주간 종합경제지 《포춘 Fortune》이 2003년 선정한 "500대 기업" 가운데 349위에 올랐다. '세계 화장품 업계의 거장', '세일즈의 귀재'로 불린다.

 

적절한 위치를 찾아라

화가 났을 때 절대 글로 옮겨 적지 마라

꿀로 더 많은 벌을 끌어 모아라

마음 속에 확고한 자신의 이미지를 풀어라

경쟁에서 눈길을 떼지 마라

분리시켜 통치하라

'아니오'라고 말하는 법을 익혀라

본능을 믿어라

거침없이 행동하라
1
실수를 인정하라

메모하는 습관을 길러라

최고의 인재를 고용하라

장애물은 부숴 버려라

신뢰가 필요한 곳에 신용을 쌓아라

훈련은 가장 강력한 판매력이다

 

에스티 로더는 1906년 뉴욕 퀸스에서 조지핀 에스터 멘처(Josephine Esther Mentzer)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헝가리 태생 유대인이다. 에스티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부르던 애칭이고, 로더는 24세 때 결혼한 남편의 성이다.
수려한 미모의 에스티는 한때 영화배우를 꿈꾸었다.
고교 졸업 후 그녀는 삼촌이 운영하던 미용연구소 일을 거들면서 화장품에 눈을 뜨게 된다.
남편이 경영하던 조그만 실크공장이 망하자 그녀는 가계를 꾸리기 위해 직접 화장품을 만든다.
자기 집 주방에서 크림을 만들어 미용실을 찾아다니며 손님에게 직접 발라 주었다.
값싸고 품질 좋은 이 크림은 점차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면서 에스티는 짧은 기간에 탄탄한 사업 기반을 마련한다.
1946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딴 에스티 로더사(社)를 설립한다.

에스티는 소위 약용 화장품 개념을 도입했다. 그녀가 피부과 전문의 도움을 받아 50년대 초 론칭한 브랜드 ‘클리니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명품이다. 또한 화장품은 여성 전유물이라는 통념을 깨고 남성용 화장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남성의 미적인 관심이 점증할 것임을 내다본 직관이었다. 64년에 내놓은 브랜드 아라미스는 이 그룹의 주력 남성화장품이다. 또한 그녀는 사업 초기의 방문판매 방식을 버리고 백화점 진출을 통해 상품과 브랜드를 고급화했다. 그녀의 백화점 입점 교섭은 집요했다. 뉴욕 색스 핍스애비뉴 백화점에 100여 차례나 신청서를 제출하는가 하면 파리 갈러리 라파예트 백화점 진출을 위해 자사 제품 향수를 백화점 바닥에 뿌려 총지배인을 감동시켰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에스티는 신상품 출시 때마다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직접 고객에게 발라주기도 했다.

에스티 로더사는 82년 어드밴스드 나이트 리페어(Advanced Night Repair)라는 최초의 세럼을 선보였고 이 제품은 이후 그룹의 베스트셀러 상품이 됐다. 에스티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중장년 연령층까지 이어지는 추세이며 또 이들이 사회활동을 하면서 피부가 쉽게 상한다는 점에 착안했다. 그래서 종래의 젊은 여성 위주 화장품 라인을 중년 연령대 이후까지로 확대시켰다. 이들의 손상된 피부를 보호하고 나아가서는 재생시킨다는 개념으로 동물의 유리체(琉璃體)에 포함된 고가의 히알루론산을 주성분으로 한 보습용 리페어 세럼을 개발한 것이다.

 

 

 


70년대 한때 일본 여성들이 프랑스·미국의 명품 화장품을 쓴 뒤 얼굴이 가렵고 두드러기가 난 일이 있었다. 짝퉁 제품에 속은 게 아니라 동서양 여성들의 피부 특성에 차이가 있음을 몰랐던 것이다. 예컨대 보습크림의 경우 서양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부가 얇은 동양 여성은 촉촉한 제품을 선호하는 반면 서양 여성은 다소 끈적거리고 유분감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에스티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해 같은 브랜드 제품도 대상 지역별로 맞춤형 상품을 공급했다. 에스티의 이런 아이디어는 여타 화장품 업체로 속속 전파됐다.

98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천재 경영인 20인’ 명단에 여성으론 유일하게 에스티 로더의 이름을 올렸다. 에스티는 다른 유대인 부호들과 같이 자선사업에 많은 돈을 희사했다. 그녀는 92년 유방암연구재단을 만들고 저명한 의학자를 초빙해 유방암 조기 발견 의식을 고취하는 사업을 벌였다. 또한 에스티는 세계에서 둘째로 규모가 큰 부다페스트 도하니 시나고그(규모가 가장 큰 시나고그는 뉴욕 맨해튼 에마뉘엘)의 복원사업을 위해 500만 달러를 쾌척해 유대인으로서의 국제적 연대감을 표시했다.

에스티는 심장병으로 2004년 7월 97세에 숨졌다. 그녀는 전형적인 유대인 여성의 강인함과 예지를 보여주며 항상 새로운 발상으로 경쟁업체를 압도했다. 가계를 도운다는 단순한 동기에서 출발한 한 젊은 유대인 가정주부의 패기와 도전이 마침내 세계 유수의 대기업을 낳는 결실을 보았다. 극심한 취업난으로 어깨가 축 처진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에스티 로더의 신화가 희망 모델이 됐으면 좋겠다.

 

 

1908년 8월 1일 미국 뉴욕 퀸스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조지핀 에스터 멘처(Josephine Esther Mentzer)로 그녀의 부모는 체코와 헝가리에서 이민 온 유대인이었다.

미모를 가꾸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피부 미용과 화장에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10대 시절 화학자인 삼촌 쇼츠가 만든 미용 크림을 미용실 등에 팔면서 화장품 제조와 판매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930년 에스티 로더는 의류업을 하던 조셉 로더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고 육아와 살림에만 전념하다가, 자신이 직접 만든 화장품을 자주 가던 미용실 손님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화장품들이 호평을 얻게 되자 본격적으로 화장품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1946년 남편 조셉 로더와 함께 그녀의 이름을 딴 화장품 회사 ‘에스티 로더’를 창업하였다.

다목적 미용 크림과 클렌징 오일, 스킨, 로션, 마스크 등 네 종류의 제품으로 시작한 에스티 로더는 1948년 뉴욕 색스 핍스 백화점 입점 이후 15년 간 미국 전역의 백화점으로 판매망을 확장하면서 고급 화장품으로서 이름을 굳혔다. 또한 1960년 영국 런던의 최고급 백화점인 해로즈를 비롯한 세계 주요 대도시의 백화점에 입점하면서부터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로 발돋움하였다.

1964년 남성용 향수와 면도용 화장품 브랜드인 아라미스를 탄생시킨 후 1976년 여성 화장품 회사로서는 처음으로 남성 전문 화장품 개발과 생산을 시작하였고, 1981년에는 소련에도 진출하였다.

남편과 함께 ‘에스티 로더’를 이끌다가 1983년 남편 조셉이 세상을 떠나자 장남 레너드에게 회사 최고 경영자 자리를 물려 주었고, 1995년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 기부와 사회 봉사 사업에 몰두하다가 2004년 4월 24일 97세의 나이에 미국 뉴욕 맨해튼의 자택에서 심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에스티로더는 [Lauder, Estee, 1908.7.1~2004.4.24] 미국의 세계적인 화장품 기업인 에스티 로더의 창업주로서 본명은 조지핀 에스터 멘처((Josephine Esther Mentzer)이고 별칭은 세계 화장품 업계의 거장이라고 불리운다.
화장품 외판원으로부터 출발하여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 에스티 로더 사의 최고 경영자로 자리매김한 `경영의 귀재`라고 불리는 그녀는 "인간은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고 부를 축적할 수 있으며 또한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외친다. 그녀는 실제로 미국 화장품업계에 뛰어들어 연간 매출액이 10억 달러에 도달할 만큼 기업화시킨 경영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아래에서는 이와 같이 우먼파워를 몸소 실천한 명품브랜드 에스티로더의 창시자 에스티로더여사를 만나보기로 하자.

본론

<에스티로더의 이력>
어려서부터 피부미용에 관심이 많았던 로더는 일찍이 화학자인 삼촌 쇼츠(John Shotz)가 만든 미용크림을 미용실 등에 팔러 다니면서 화장품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자신이 직접 만든 화장품을 미용실 손님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며 고객을 확보한 뒤, 화장품이 인기를 끌자 1946년 남편 조지프(Joseph) 로더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화장품 회사 `에스티 로더`를 창업하였다. 1948년부터는 뉴욕의 백화점에 제품을 납품해 고급 브랜드의 이미지를 굳혔고, 업계 최초로 무료 샘플과 고급 매장 전략으로 고객을 확보하면서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로 성장시켰다.
에스티 로더사(社)는 2004년 현재 종업원 2만 명에 10여 개의 화장품·향수 회사를 거느린 세계 최대의 화장품 그룹으로, 매년 120여 개국에 10억 달러 이상을 수출하고 있으며, 연간 매출액만도 47억 달러에 이른다.
1982년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과 함께 회사를 경영하다가 1995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1998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의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천재 경영인 20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었고, 에스터 로더사는 격주간 종합경제지 《포춘 Fortune》이 2003년 선정한 "500대 기업" 가운데 349위에 올랐다. `세계 화장품 업계의 거장`, `세일즈의 귀재`로 불린다.

 

 

* 에피소드

 


젊은 시절 에스테 로더는 부자동네 어느 미용실에 들렀다가 한 부잣집 마나님에게 모욕을 당했다.


 "어머나 블라우스 좀 봐 너무 너무 예쁘고 우아해요 ! 도대체 어디서 사신 거예요?"

 라고 물었다가


 "자네가 알아서 뭘 하게? 어차피 자네 같은 가난뱅이는 평생 손도 대지 못할 텐데"라는 핀잔을 들었다.


 에스테로더는 대꾸도 못한 채 울면서 미용실을 뛰쳐나왔다.


 하지만 자존심은 대단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앞으로는 죽어도, 죽어도, 누구도 나에게 가난하다는 말을 못하게 만들 거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라며 맹세에 맹세를 거듭했다고 한다.


그녀는 성공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연구했고 마침내 성공을 불러들이는 내면의 힘을 얻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 결과는 아는바 대로 부잣집 아줌마의 모욕을 받던 처지에서 4조 원대에 달하는 자산을 가진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 에스테 로더사의 주인이 된 것이다.


에스테 로더는 자서전에서 성공을 끌어들이는 에너지를 갖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당신의 꿈을 시각화하라 만일 당신이 마음의 눈으로 이미 성공한 회사, 이미 성공한 거래, 이미 달성된 이윤 등을 볼 수 있다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미 성공한 모습을 마음속으로 생생하게 그리는 습관은 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나는 백화점에 입점하기 전부터 에스테 로더사의 제품이 대형 백화점에서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달성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꿈꾸곤 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백화점에 입점할 때마다 수천 번씩 그렇게 했다. 그러면 내 마음속의 그림은 진짜로 현실이 되곤 했다. 성공을 시각화 하면 그 이미지는 반드시 현실이 된다. 이 놀라운 원리는 위대한 성공을 거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고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사업계, 투자계, 운동계를 비롯한 각계 정상에 올라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방법을 실천하고 있다.”

 

 


약국에서 사용하는 갈색병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패키지가 나이트 리페어(Night Repair)의 특징이다. 스포이트가 달린 갈색병은 이 제품의 가장 강렬한 상징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갈색병’이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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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인재교육

등록일201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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